10월 15일~19일
용산공예관 아트홀
올해 86세로 현역 세공인 가운데 최고령인 저전 황갑주 장인이 오는 10월 15일부터 19일까지 용산공예관 아트홀에서 ‘업계입문 70년 기념 회고전’을 개최한다. 저전 선생은 이번 회고전을 앞두고 본지에 다음과 같이 회고록을 보내왔다.
1939년 말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전남 순천시 저전동에서 태어난 저는 조부모님 대에서부터 모태 신앙인 천주교 집안으로 평탄한 생활을 하던 중 여순(여수·순천) 국군반란 사건과 한국 전쟁으로 피난 생활에 가정은 궁핍하여, 기술을 배우면 장래가 밝다는 부친의 권유로 세례 대자이신 조채호 선생님의 보석당 금은방에 입사해 업계에 입문했습니다.
입사 5년 만에 상경, 중구 충무로 입구 현재 신세계 백화점 금은부 1호점에 조진옥 선배님의 공방에 취업, 2년간 금세공 조각을 하고, 한국은행 앞 김기철 선배님이 운영하신 백금 보석 특수공방에 취업, 2년간 전수를 받던 중 김기철 선배님께 약간의 부채를 떠안고 공방을 인수해 24세에 보영사란 상호로 독립을 하였습니다.
그 후, 금은상 사장님의 적극 지원으로 세공 기능인을 계속 증원하면서 재능있는 제자들은 기능 올림픽에 출전시켰는데, 1969년 4월 박천수 제자가 경인지역 기능 올림픽에 출전해 1위를 차지하며 참신성과 성실성을 인정받았습니다.
미도파 백화점과 롯데1번가, 코스모스백화점 점주의 요청에 따라 명동에 제2의 공방을 운영하면서 직원들이 50여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당시엔 한일 관계 정상화로 한때 국내 금은상 업계는 호황을 누렸습니다.
틈틈이 국가무형문화재 제35호 조각장 백하 김정섭 선생님으로부터 3년간 전통조각 기법을 전수받았고, 대를 이은 자제 범사 고 김철주 35호 조각장과는 호형호제로 지냈습니다.
1975년 5월 재단법인 한국귀금속보석기술협회 설립 이사와 초대 명예 회장으로 5년간 활동하면서 전국 세공인의 인권 보호와 단합에 앞장섰고, 1977년 8월 국내 최초로 한국 귀금속 보석 작품전을 미도파 백화점 4층 장미화랑에서 성대히 거행했습니다.
1979년 7월부터 1개월간 선진국 시장조사와 기술개발에 역점을 두고 미국 뉴욕과 L.A를 돌아보면서 귀금속보석 유통시장과 공방 실태를 조사하고 한국귀금속보석기술협회에 보석감정장비, 보석감별기, 각종 세공 공구를 수입하여 협회 발전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귀금속 보석 세공업 입사 당시에는 조선 시대의 남녀 신변장신구에 한정되어 있었으나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옛것을 본받아 새롭게 창조한다는 정신을 살려 현재는 한민족 5천년사(史)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5천년 단군의 역사이래 우리 귀금속 보석문화는 석기시대의 옥(玉)으로 부터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통일신라, 발해, 고려와 조선,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종 보물인 실물과 도자기를 모티브로 작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국내 유일의 문자 투각은 제가 특수하게 개발한 예술 분야로 순은을 넓게 단조(두들김)하여 붓으로 쓴 문자를 붙이고 가는 톱날로 재단하여 제작합니다.
은(銀) 문자 투각은 좌우명이나 가훈, 명언, 명시, 각종 디자인, 한글, 켈리그라피 등 다양한 작품으로 제작돼 영구적 가치가 있습니다.
국내 유일의 창작예술로 용산공예관 수강생과 저의 공방에서 개인지도를 하고 있으며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오직 한길로 걸어온 지난 70년 세월,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저에게 존경하는 선배, 동료, 후배 여러분의 충고와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비록 ‘당구지락(堂構之樂. 가업을 잇는 즐거움)’은 아니지만 ‘대기만성(大器晩成)’을 향해 고단한 장인의 길로 가고자 하오니 많은 지도편달을 바랍니다.
‘장인 황갑주 한민족 5천년’이라는 귀금속보석 전승공예 입문 70주년 회고전이 끝나면 비록 졸작이지만 기증관을 세우는 것이 작은 소망입니다.
작품 마감까지 작품전에 기꺼이 후원해 주시고 협찬해 주신 모든 분께 지면을 통해 다시 한번 정중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국귀금속전통공예연구소
저전 황갑주 근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