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공화국(전두환 정권) 때 한강을 정비하기 전까지는 서울과 경기도 일원의 건설공사 현장에 모래와 자갈을 주로 공급한 것은 한강이었다. 한강 변에 레미콘 업체가 많았던 것도 모래와 자갈의 공급을 싸고 빠르게 조달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래 채취는 한강에 커다란 준설선을 띄어 놓고 강바닥의 모래를 긁어모으는 작업이었다. 모래 채취 업체는 강변에 10m가 훨씬 넘는 높은 철탑을 세우고 경사면을 만든 다음 맨 위는 가마니나 헌 카펫을 깔고 작은 쫄 때를 한 뼘 거리로 촘촘히 박아 놓았다. 그다음 밑으로는 모래가 통과되는 작은 구멍의 쇠 철망을 설치하고 그다음 밑에는 좀 더 큰 크기의 구멍 철망, 또 그다음에는 주먹 크기의 구멍이 있는 철망 등을 차례로 설치하였다.
반대편 강변 쪽에는 철탑과 연결하는 컨베이어 벨트를 설치하여 채취한 모래와 자갈을 철탑 위로 끌어 올려 물과 함께 철망을 설치한 곳으로 쏟아부었다. 그러면 자갈과 모래가 철망을 설치한 쪽으로 물에 밀려 내려가면서 구멍 크기대로 모래와 자갈이 분류되어 밑으로 쏟아져서 맨 안쪽에는 모래, 그다음에는 자갈이 크기별로 분류가 되는 것이다.
이 모래 준설작업 동안에 눈에 안 띄게 작은 부수입을 올린 것이 사금이었다. 사금(砂金)이란 작은 금 알갱이를 말한다. 산골짜기에 있던 금광석이 부서지면서 나오는 작은 금 알갱이들이 홍수나 빗물에 쓸려 내려가면서 하천과 강바닥에 모이는 것이다. 물길에서 굽이를 도는 뒤쪽의 퇴적층과 물길이 만나는 합류 지역의 큰 바위 밑이나 바위 틈새에 금 알갱이가 가라앉게 된다. 이렇게 강바닥에 사금이 모이는 것이다.
자갈 채취를 끝낸 인부들이 철탑 맨 위에 설치한 가마니와 카펫을 들어내어 거기에 박힌 모래를 털면 제법 알갱이가 커다란 사금과 밀가루처럼 아주 미세한 사금가루를 얻을 수 있다. 여기에 걸러지지 않은 사금은 쫄 대에 걸리게 되어 있다.
이런 사금 채취 방법은 세계 각국에서 응용하고 있고 준설선에 이런 장치를 하여 사금 채취만 전용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모은 사금들을 바가지 같은 용기에 수은과 함께 휘저으면 사금은 모두 수은 속으로 들어가 아말감이 되고 모래와 철분만 남는다. 수은에 함유된 아말감 사금을 따로 덜어내서 토치 불로 녹이면 수은은 휘발되고 금만 남게 된다.
한강의 사금은 금함량이 우수해서 최하 75%에서 90%의 함량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강에서의 사금 채취는 본업이 될 정도의 산출량은 못 되어서 모레 채취 업자는 인부들에게 사금을 양보해서 퇴근 후에 막걸리 한잔하도록 배려하곤 하였다는 것이다. 한강 줄기에서는 임진강과 합류하는 김포 쪽에서 산출량이 조금 더 많은 편이었다. 한강은 발원지가 강원도 정선이고 임진강은 길이가 훨씬 짧지만 두 강의 합류 지점에서 사금이 모인 것이다.
본래, 남한에는 김제 평야, 충남 성환 인근의 직산 하천, 홍성 지방의 하천, 공주지역 등을 4대 사금광으로 친다.
직산에서는 대한제국 시대에 일본인이 허가를 받았다가 미국인 앨버트가 인수하였는데 우리나라 최초로 금배라고 불리는 준설기를 들여와 많은 돈을 벌었다.
앨버트는 미국 통신사 특파원도 겸하였는데 최초로 3.1독립선언서를 외국에 보내 3.1운동 사실을 세계에 알린 조선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금으로 번 자금을 미국에서 직산이라는 브랜드로 공구회사를 차려서 큰 회사로 키웠다. 앨버트는 일제강점기에 쫓겨나 1948년 미국에서 죽었지만, 한국에 묻히길 원하여 지금 양화진에 잠들어 있다.
김제지역에는 일제강점기에 9개 큰 금 광산이 있었고 대략 2~3천여 명이 여기에 종사하였다. 금광의 광부는 금이 절실했던 일제가 징용을 면제해 주어서 간악한 일본인 광주는 이를 핑계로 임금을 형편없이 짜게 주었다. 인부들은 징용을 면제받아서 불만을 할 수가 없었다. 김제지역의 금광은 비교적 양호해서 어느 금광은 지하 120m까지 파 내려갔고 굴진한 길이가 11km에 달하기도 했다.
이렇게 금이 있는 광산에서 수만 년에 걸쳐 토사가 내려오며 강줄기를 타고 김제 평야로 흘러들어 사금이 퇴적된 것이다. 신기하게도 우리나라 지명에 금(金)지가 들어가는 곳은 거의 100% 금이 산출되고 있다.
현대에 들어와 새삼 김제 평야의 사금 채취가 뉴스를 탄 것은 1984년 12월이었다. 전북 김제의 산동, 월전, 용전, 금구면, 낙성면 일대의 10여만 평 논이 사금 채취를 하느라 벌컥 뒤집어졌다. 50여 채광업자가 굴착기와 사금 선별 기계 60여 대 그리고 일당을 받는 인부 수백 명과 함께 그 넓은 논판에 흩어져 작업하였다. 봄이 되면 농사를 지어야 하므로 동지섣달에 작업하는 것이었다.
그 전해 1983년도에 B모 씨가 포크레인 1대로 한겨울 4달 작업해서 2억여 원을 벌었다고 소문나면서 너도나도 사금 채취를 한다고 달려든 것이다. 채금업자들은 논 8천 평 정도에 평균 8~9백만 원의 사용료를 주고 4달을 계약했다고 한다. 논 주인은 사금 업자들이 논바닥을 뒤집어 놓아서 좋고, 농한기에 200평 논 1마지기에 쌀 4가마 값을 받으니 2모작 한 셈이라 얼씨구나 계약하여 준 것이다.
채금업자들은 폭 20~30m로 대략 5m 깊이에서 때로는 15m 깊이까지 흙을 파내서 사금을 선별하였다. 사금 선별기는 2~30°경사의 높은 구조물을 만들고 약 1.5m 폭으로 사각 홈통을 설치하여 파낸 흙과 물을 흘려보내는 구조이다. 사각 홈통 바닥에는 헌 카펫을 까는데 중간중간 작은 쫄 대를 설치하여 흙보다 비중이 높은 금이 쫄 대나 카펫 바닥의 요철부에 걸리게 한 것이다.
그해 겨울에 채금업자들은 위치에 따라 파산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래도 집 한 채를 장만했다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김제(金堤)는 금의 언덕이란 뜻이고 금구면(金溝面)은 금의 도랑이란 뜻이다. 이곳은 만경강과 동진강이 흘러가는데 수천만 년 동안 강줄기가 어떻게 변했는지 아무도 모르는 곳이다. 이미 일제강점기에 미쓰비시(三菱)에서 논바닥의 사금 채취로 큰 재미를 본 곳이기도 하다.
일본인들이 손댄 곳은 허탕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어디에서 작업했는지 자료가 없어서 실패 확률이 높았지만, 후세 사람들은 설마와 혹시라는 도박 심리로 재산을 축내고 한겨울 혹한에 고생한 것이다.
김제에서 사금 채취에 매달린 사람들은 일부는 재미를 보았다고 하고 일부는 투자금을 날려서 알거지가 된 사람도 있다는 풍문이지만 실상은 아무도 모르고 사금을 캤다는 전설만 남아 있다.
전 (사)한국귀금속감정원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