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모으기 운동은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 요청 당시 대한민국의 부채를 갚기 위해 국민들이 소유하던 금을 나라에 자발적·희생적으로 내놓은 시민운동이다. 당시 대한민국은 외환 부채가 약 304억 달러에 달해 모라토리엄(Moratorium)을 IMF에 요청할 위기에 놓인 것이다.
모라토리엄(Moratorium)이라 한 국가가 경제·정치적인 이유로 외국에서 빌려온 차관에 대해 일시적으로 상환을 연기하는 것을 말한다. 모라토리엄은 상환할 의사가 있다는 점에서 지급 거절(Default)과는 다르다.
어찌 되었든 우리나라가 국가 부도를 선언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귀금속 업계의 뜻있는 몇몇 인사들이 국내의 금을 사들여 달러와 바꾸던지, 아니면 영국의 영란은행에 금을 예치하고 달러를 빌리면 될 것 아닌가 하는 의논을 하고 있었다. 전국에 산재한 1만여 군데의 귀금속점에서 국민들이 들고 오는 금을 충분히 사줄 수가 있고 서울의 도매상에서 이를 수집하여 외국에 수출하면 달러를 구할 수가 있다고 본 것이다. 굳이 외국에 수출하지 않더라도 금을 한국은행에서 매입해 주면 된다고 본 것이다.
그러던 중 몇몇 사회단체에서 금을 모으자는 소리가 나오고 1998년 1월 5일 KBS에서 ‘금 모으기’ 캠페인 방송을 시작하며 금모으기운동이 본격화되었다. ‘금모으기운동’에 참여하는 일반인들이 금을 내놓으면, 귀금속 업계에서 파견한 전문 감정가가 금을 감정한 확인서를 써주게 되며, 수출 후 국제시세와 환율을 평가해 나중에 원화로 받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운동은 전국에 열화와 같이 번지고 1월에 가장 많은 165.65t이 걷혔고, 2월에는 53.96t, 3월 5.38t, 4월 800kg이 모였다. 전국적으로 3백51만여 명이 여기에 참여했다. 4가구당 1가구꼴로 평균 65g을 내놓은 것이다.
이들 중 2만1천 명은 합계 187㎏의 금을 헌납했으며 1천7백35명은 1백31㎏을 국채를 사는 형식으로 위탁했다.
수집기관별로는 주택은행(KBS-대우)이 136.4t으로 가장 많았고 농협(MBC-삼성)이 48.24t, 국민은행과 새마을금고(SBS-LG)가 33.68t, 외환은행이 4.25t, 기업은행이 1.98t씩을 모았다. ‘제2의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날마다 감동적인 일이 벌어졌다. 전국의 은행마다 금붙이를 든 사람들이 줄을 섰다. 하나같이 소중한 사연이 담겨 있는 귀중한 재산이었지만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다. 시민들이 나라의 빈 곳간을 자신의 금으로 채우고 있었다.
신혼부부는 결혼반지를, 젊은 부부는 아이의 돌 반지를, 노부부는 자식들이 사준 회갑기념 반지를 내놓았다.
이러한 운동 덕에 예정보다 3년이나 앞당겨진 2001년 8월 IMF로부터 지원받은 195억 달러의 차입금을 모두 상환했다. 현재까지 국가 부도를 당한 나라치고 외채를 탕감받기만 하였지 전액 상환한 나라는 한국뿐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추기경 취임 때 받은 십자가를 쾌척했다고 한다. 그 귀한 것을 어떻게 내놓으시냐고 주위에서 안타까워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수님은 몸을 버리셨는데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천금 같은 귀한 말씀이었다.
그러나 가장 희극적인 것은 국회에서도 금 모으기에 동참하여 총 13kg을 내놓았다. 당시 국회의원 총원이 288명이었으니 1인당 약 45g(12돈)을 내놓은 것이다. 국민 1인당 평균보다 적다고 당시 언론에서 조롱하는 방송을 하였다.
그러나 어느 국회의원도 이를 부끄러워하거나 자성했다는 후문은 없었다.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채권’을 발행하여 금을 매입하는 식으로 해결했어야 했다. 채권이나 지폐가 결국 종이 인쇄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다만 국가에서 보증한다는 것뿐인데 얼마든지 국채를 발행하여 금 매입 자금을 만들 수가 있었다. 그러나 국민들의 금을 받는 대로 몽땅 외국에 팔았으니 당시 정부의 행동은 참으로 경솔하고 어리석은 행태였다.
모인 금은 거의 대부분 수출되었다. 금을 수출한 대금은 22억 달러이다.
당시 김영삼 정부의 관리들은 정권 말기라 손을 놓았고 대통령 당선인인 김대중 대통령은 여기에 개입할 계제가 아니었다. 고위 공무원들은 외환위기 책임을 모면할 궁리만 하고 국가 장래를 걱정하는 진정한 공복(公僕)은 없었다.
금 모으기 이전의 한국은행 금 보유량은 10.4t 정도였는데 무려 그 20배가 넘는 금이 모인 것이다. 만일 한국은행에서 이것을 모두 사들였다면 2019년 6월 기준 벨기에의 금 보유량과 맞먹게 되며, 중앙은행 금 보유액으로는 22위에 해당하는 양이 될 것이었다.
나중에 2월 6일에는 한국은행에서 모인 금을 수집하여 보유 외환으로 활용하려고 보니, 기업들이 자기들 빚 갚으려고 모인 금을 급하게 수출해버려 남은 금이 없었다고 한다. 한국은행은 모인 금 가운데 겨우 3.04t만을 확보하였다고 한다.
당시 한국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금의 양이 10.4t에 불과했다는 걸 생각하면 이것도 매우 많은 양이기는 하지만, 227t의 금을 모두 한국은행에 집중해서 보유 외환으로 전용하지 못한 점은 정말로 아쉬울 수밖에 없다.
특히 금은 안전자산으로 유사시 최종결제수단이라 IMF 외환위기와 같은 비상사태에서 더더욱 빛을 발하고, IMF 외환위기가 진정된 다음 금 시세는 급등하였으니, 몇 년 후 한국은행에서는 금을 사들이기 시작했는데 금값이 고공 행진할 때를 잘못 택해서 국고를 거의 1조 원가량 손실을 보게 하였다.
게다가 국제 금 시장에 엄청난 양의 금이 한순간에 유통되면서 시장 교란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당연히 시세 폭락으로 국제적인 비판에 직면한 것은 물론이다.
한국 대기업들도 시세 폭락으로 제값을 못 받고 파는 바람에 수익이 신통찮았다고 한다. 이것도 결국은 개인이 엄청난 손해를 본 것이다. 기업간에 파는 속도를 완급 조절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제 발이 저린 기업들이 국가가 뺏어갈까봐 급하게 팔아치웠다는 것이다.
금 모으기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파시즘 정권기에 유사 사례가 있었다.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결과 영국-프랑스 연합국이 이탈리아 왕국에 부과한 어설픈 경제제재는 오히려 이탈리아 국민들의 애국심과 단결성만 높여줬고, 자발적으로 금 모으기 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유럽 추축국의 패망이 목전에 다가온 45년 4월, 무솔리니가 파르티잔에 잡혀 죽던 날에 메라 하천에서 한 어부가 이 금반지들을 발견하였다. 파시스트 지도자들이 국민들이 모아준 금붙이를 은닉했다가 도주하면서 유기한 것이었다. 독재자란 말로는 국민을 위한다지만 기실 저 자신만을 생각하는 위선자들인 것이다.
외환위기 때 바보짓 한 것은 금 문제만이 아니었다. 3.1 빌딩 같은 알짜 건물들이 그냥 헐값에 넘어가고 IMF에서 요구하는 대로 구조조정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가장이 길거리로 내쫓겼던가?
이른바, IMF 외환위기는 국가와 대기업들의 경영진이 무능했고, 그에 못지않게 정부 관리들의 태만과 자질 부족으로 생긴 참사이다. 근로자는 ‘금 모으기 운동’ 뿐만 아니라 강도 높은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실직하였고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어떤 중소기업 사장은 멀쩡하던 회사가 부도를 맞아 서울역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때의 경험으로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꼰대 세대)를 혐오의 빌미로 삼았다. 기성세대인 태극기 부대는 극혐의 대상이 되었고, 장차 국가위기 상황이 오더라도 외면하겠다는 극도의 개인주의가 사회 전반에 나타났다. 외환위기 이후 종교적 신념을 핑계로 군대를 기피하며 외국으로 도피하고, 자기 자녀를 위해서는 경력 위조도 서슴지 않는 ‘내로남불’과 몰염치가 일상화되었다.
이 금 모으기 운동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이 귀금속상이 배제되고 대기업들이 금 수출을 하면서 달러를 자기네 회사의 달러 채무 갚는데 소진했다는 사실이다.
전 (사)한국귀금속감정원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