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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한말에 종로 4가에서 박승직(1864~1950)이 보부상으로 출발하여 포목점을 개업하였는데 천성이 성실하고 신의가 있어 장사가 크게 번창하였다. 현재 효성 주얼리 상가 입구에 있었던 박승직 상점은 종루 육의전에서도 거상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박승직의 부인 역시 사업 수완이 탁월하여 화장품 공장을 차리고 ‘박가분(朴家粉)’을 판매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화장품이라면 박래품(舶來品)이라 부르던 출처가 불분명한 중국에서 온 외래품이었고, 이마저도 아무나 살 수 있는 가격이나 물량이 아니었다. 

    

   그러한 차제에 이름있는 ‘박승직 상점’에서 제조했다는 ‘박가분’은 기생방을 중심으로 여염의 아낙네가 탐을 내는 화장품이 되었다.  

    

   그러나 ‘박가분’이 한창 주가를 올리던 차에 큰 문제가 발생하였다. 박가분을 처음 바르면 얼굴이 하얗고 창백하게 보일 정도로 효과가 좋았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면서 얼굴이 군데군데 시커멓게 변하면서 연독(鉛毒)이 생기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박가분에 문제가 있음을 직감하고 박승직 상점에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기생들과 양반댁 마님들로부터 엄청난 항의를 받았다. 다행히 부작용을 일으킨 사람이 많지 않아서 보상을 해 주고 박가분 판매를 중단하여 적기에 잘 수습되었다. 

    

   당시 화학 지식이 없어 다루기 쉬운 납 용기를 썼거나 납 성분의 석분(石粉)을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납덩어리가 공기 중의 황화가스나 산과 결합하여 산화납이 되면 하얀 분말이 생기는데 이 하얀 분말이 사단을 부를 수도 있는 것이었다. 

    

   당시는 수은 성분의 주사(朱砂)도 치료제나 물감, 인주, 부적 등 곳곳에 응용되곤 하던 때이었다. 결국, 박승직 상점에서는 화장품 사업을 접게 되었다. 다행히 잘 수습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불명예는 지금도 인구(人口)에 회자 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해 사건으로 기록된 것이다.  

    

   박승직의 포목점은 주식회사로 전환하였는데 주식회사 두산(斗山)으로 하였다. 쌀을 되는 말(斗)이 산처럼 쌓이라는 부를 향한 염원을 담은 것이라 했다. 

    

   두산 그룹은 그 후 맥주회사로 크게 성공하였고, 그를 바탕으로 건설장비와 원자로 산업, 해수의 담수화 사업 등 중공업의 기간산업에 진출하여 우리나라 굴지의 회사로 성장하였고 박승직의 자손들도 재계의 거목으로 성장하였다.

    

   두산은 ‘박승직 상점’에서 출발한 몇 안 되는 우리나라의 백 년 기업이다.

   현재 100년을 넘긴 회사가 동대문시장의 ‘광장주식회사’와 활명수로 유명한 동화약품(1897), 마산의 몽고간장(1905)과 함께 두산(斗山)의 4개 회사가 있을 뿐이다. 

    

   그 외에 100년 전에 설립된 은행으로 조흥은행 등 두 군데가 있었지만 타 은행에 흡수 합병되어 이름을 유지하는 곳은 하나도 없다. 

    

   광장(廣藏)시장은 고종황제가 남대문과 본정통(명동)에서 일본인이 상권을 장악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내밀하게 내탕금(內帑金)을 쓰더라도 배오개 다리 근처(예지동 인근)에 근대식 시장을 개설하라고 궁내부 특진관 김종한에게 지시하였다고 한다. 

    

   김종한은 내탕금을 차마 쓸 수가 없어 당시 갑부로 통하던 박승직에게 부탁하여 1905년 시장 개설 허가를 내주고 박승직, 장두현, 최인성, 김한규 등이 자본금 1,600원을 투자하여 광장시장 주식회사를 열게 되었다. 

    

   본래 한양에는 재래시장으로 마전(馬廛)과 채소 시장을 겸한 배오개 시장(梨峴 시장), 서소문 밖 칠패 시장(서소문에서 남대문 시장으로 발전)과 종로통의 종루 육의전(六矣廛) 등 3대 시장이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진흙밭이던 진고개(명동)를 개발하고 미스꼬시 백화점(현 신세계)을 열어 한양의 상권을 독점하였다. 

    

   광장시장은 최초의 민족 자본으로 만든 시장으로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의 자본에 말리고, 6·25 동란에는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6·25로 초토화되었지만 시장 상인들의 피땀으로 시장을 복구하여 피복과 그릇, 양품점 시장으로 재건되었는데 창신동과 평화시장에서 생산된 의류가 광장시장의 도매점을 거쳐 전국으로 공급되었다. 

    

   70년대 초에 전태일의 분신 사건으로 의류공장의 실태가 재조명되고 평화시장이 개편되기는 했지만, 전란을 딛고 일어서려는 산업화의 몸부림이 표출된 것이다. 

    

   전태일의 분신 사건은 얼마 뒤 동일방직 사건으로 확대되어 열악한 작업 환경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들 청소년의 피땀이 조국 근대화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뿐이 아니고 산업화의 고통을 견딘 영국의 광산 노동자도 똑같은 아픔과 상처를 딛고 일어선 것이다. 광장시장에는 최근 코로나의 어려운 상황임에도 현재 1,200여 점포가 성업 중이다. 

    

   광장시장의 청계천 방향에 중앙당, 평안당, 흥신당, 동양장 등 귀금속 소매상이 있었다. 이들 금은방에서는 옛날식 패물이 주로 판매되었다. 광장시장의 상인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친 구대인 이라 불리는 상인들과 1.4 후퇴 시 월남한 이북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광장시장에서 포목점을 하는 여 사장님들은 주로 호박, 산호, 당자 마노, 비취나 옥 제품 같은 패물을 선호하여 여름에는 하얀 모시옷에 굵은 산호 반지나 백옥 반지, 비취반지 등을 달았다. 

   부산의 국제시장 상인이나 남대문 시장, 광장시장 상인의 대부분은 1.4 후퇴 시 월남한 사람들이었는데 맨주먹과 빈손뿐으로 엄청난 고난을 겼었고, 이산가족의 뼈아픈 사연들이 있어서 생활력이 강하였다. 

    

   이들은 돈이 생기면 은행보다는 수중에 움켜쥐기를 선호하였다. 그들은 몇 푼이라도 생기면 금붙이를 사서 모았는데 전쟁통에 엄청난 인플레를 경험하였기에 은행도 불신하고 오로지 금붙이만 선호하였다. 그 덕을 광장시장에 터를 잡은 금은방이 본 것이다. 

    

   이북에서 피난온 이들은 북한에 남겨둔 식구들을 위한 자금으로 금의 효용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남한 돈이나 북한 돈보다는 오로지 금이 화폐가치의 중심이라는 것을 몸으로 터득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돈을 벌면 금을 사 모았는데 통일이 되면 지니고 갈 것은 금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 하나 특기할 것은 자유당 말기 정치 깡패의 상징이었던 이정재, 유지광 등의 활동 근거지가 이 광장시장과 건너편의 한일극장이었다. 

    

   광장시장은 동대문시장으로 통칭 되었는데 이들 정치 깡패는 주로 동대문시장 상인들로부터 보호비 명목으로 갈취한 자금이 활동 자금이었다고 한다. 

    

   어쩌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멋모르고 무심코 “이 옷 얼마요?”하고 물어보면 그 옷을 사지 아니하면 안 되었다. 험악한 인상의 젊은 건달들이 에워싸서 그 옷을 살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이런 행패를 볼 수 없게 시민의식이 발전하였다. 그와 함께 우리나라에도 100년 된 기업이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자랑스러워 광장시장 이야기를 쓴다.

   

   전 (사)한국귀금속감정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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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2-09-02 18: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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