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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가 1945년 8월15일 일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지만, 땅과 사람만 놓고 갔을 뿐 무엇하나 제대로 남겨 두지 않았다. 거기에다 상해 임시정부는 미국 등 승전국으로부터 대한민국 정부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정부가 없으니 임시로 미국의 군정 통치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가까스로 남한만 자유 민주 정부 수립 절차를 밟게 된 것이다. 

    

   북한을 차지한 소련은 북극곰처럼 미련해 보여도 약삭빠르게 제 실속을 챙겼는데,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이틀 후 8월 8일 부랴부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총 한 방 안 쏘고 일본에 선전포고했다는 구실로 3.8선 이북이 소련의 손아귀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소련은 새파란 30대의 김성주를 90세 가까운 나이의 전설적 항일 장군 김일성이라 사기쳐서 평양에 등장시키므로 소련의 꼭두각시로 만든 것이다.  

   남한은 극렬한 좌익의 방해가 있었지만, 외국 사정에 정통한 이승만의 주도로 1948년 5월 10일 국회의원 선거를 치렀다. 

    

   그리고, 5월 31일에 개원한 제헌국회를 통하여 7월 17일에는 헌법을 제정하고 이 제헌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하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 미국의 군정도 종식되었고 미군의 철수도 속속 이루어졌다.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했지만, 미군이 철수한 절호의 기회를 노린 김일성이 남침을 감행하였다. 전대미문의 동족상잔의 비극, 6·25동란의 시작이었다.

    

   정부는 북괴군과 전쟁을 치르는 한편 남한 경제를 교란하는 남로당 일파가 조선정판사에서 인쇄한 위조지폐의 유통을 저지하여야 했다. 일제가 철수하는 와중에 남로당 일파가 화폐 원판을 빼돌렸던 것이다. 이 위조지폐는 진본 동판으로 찍은 것이므로 구별이 불가해서 남한 경제가 심각하게 혼란을 겪었다.

    

   그때까지 우리나라는 일제가 만든 조선은행권을 사용하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경제 교란을 막는 단 하나의 방법으로 화폐를 새로 발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다급한 사정을 호소하자 미국 역시 한국 정부의 화폐개혁을 적극 지지하게 되었다. 맥아더 장군은 미군의 감독하에 일본 대장성 산하 인쇄창 타키노가와 공장에서 한국은행권을 인쇄하게 하였다. 

    

   미군의 급박한 독촉으로 도안 하나에 6개월이 소요되는 것을 단 이틀 만에 완성하고, 10여 일 만에 인쇄를 마쳤다. 그렇게 기적같이 인쇄된 한국 은행권을 1950년 7월 13일, 미 군용기로 김해공항에 1,000원권 60억 원 어치를 운송하였고, 다음 날 1천 원권 92억 원, 1백 원권 2억3천만 원이 도착했다.

    

   좌이박화폐412.jpg

    

   1,000원권 화폐는 좌측에 이 박사 초상을 그려 넣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좌 이박(사진)’이라고 하였다. 100원권은 광화문을 그려넣었다. 이 새로운 화폐는 진정한 대한민국의 화폐였고 8월 28일 긴급명령 제10호로 ‘조선은행권의 유통과 교환’ 명령을 발하여 종전의 조선은행권과 1대1로 맞교환하였다. 

   비로소 조선은행권이 역사에서 사라지고 한국은행권 시대가 온 것이다. 

    

    

    

   6.25 전쟁 와중에 최초의 한국은행권은 어쩔 수 없이 일본에서 인쇄하였고 그다음, 환으로 표시한 화폐의 인쇄는 미국에서 하였다. 

   이때의 인쇄비용은 모두 미국이 부담하였다. 전시 중이고 국고가 비었으므로 인쇄비를 부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재정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미국이 비용을 부담해준 것이다. 참으로 비참했던 우리나라 현실이었다.

    

   화폐개혁(Currency reform)이란 구화폐의 유통을 정지시키고 신화폐로 강제 교환하여 인위적으로 화폐의 가치를 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 비용으로 거의 1조 원대로 통화량으로 늘어나고 그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 긴급통화조치 즉 화폐개혁이었다. 

    

   1953년 2월 17일 실시한 제2차 통화 개혁인 ‘긴급통화조치’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화폐단위를 원(圓)에서 환으로 변경하고 100원을 1환으로 한다. 

   둘째, 조선은행권과 원으로 표시된 한국 은행권의 유통을 금지한다.

   이때의 2차 화폐개혁은 남발한 통화를 정리하고 인플레이션을 수습하며 경제부흥자금을 조달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화폐교환 시 전체 예금의 24%가 동결되어 경제부흥을 위한 자금조달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통화 개혁조치로 1953년 2월 17일부터는 다섯 종류의 새로운 한국 은행권이 유통되면서 우리나라 화폐는 독립국으로서의 독자성이 확보되었다. 

   이 화폐개혁 조치로 1958년에는 물가가 안정되고 화폐가치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었다. 한국은행은 소액거래의 편의를 위해 최초로 1959년에는 50환, 10환, 100 한화 등 3종의 주화를 발행하였다.

    

   그 후 1960년 4.19 민주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졌고, 장면 정권을 거쳐 군사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의 정부는 1962년 제 3차 화폐개혁을 단행하였다. 

   침체한 경제를 되살리고, 1957년을 정점으로 외국 원조가 격감하여 자립경제를 위한 자금조달 방책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부는 1962년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공표하였다. 

   그해 1962년 6월 10일 단행한 ‘긴급통화조치(화폐개혁)’는 환 표시의 화폐를 원(圓)으로 표시하고 10환을 1원으로 하며 환표시 된 화폐의 거래를 금지하였다. 금융기관의 신규예금과 기존예금에 대해서도 동결 조치하였다.

    

   1962년의 화폐개혁은 혁명을 표방한 군사정부가 전 정권에서 남발한 통화량을 조절하고 부정축재자의 은닉자금을 끌어내려는 조치였다. 자유당 정권에서 부정, 부패의 방법으로 축재한 지하 자금이 막대할 거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6.25 후유증으로 산업 활동이 미미하여 큰 자금이 축적될 수가 없었다. 일부 정치인이 축재했다고 하여도 뇌물로 받은 액수는 푼돈 수준이었고, 경제인들은 생산활동과 공장에 투자할 자금이 모자라는 판에 숨겨둘 자금이 있을 턱이 없었다. 정부 예상과 달리 부정축재 나 지하 자금이 많지 않았다. 

    

   더구나 강력한 예금봉쇄조치로 시중의 유동자금이 부족하여 경제 자체가 마비되기 시작하였다. 박정희 정부에서는 어쩔 수 없이 예금봉쇄 조치 한 달 만에 이를 전면 해제하였다. 화폐개혁의 소기 목적이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새로운 화폐는 비밀 유지를 위해 영국에서 인쇄하였다.

   그 후 경제성장으로 거래단위가 높아짐에 따라 1972년 7월에 5,000원권, 1973년 6월에 10,000원 권을 발행하였다. 2009년 6월에는 50,000원의 고액권이 발행되었다.

   

   

   

   전 (사)한국귀금속감정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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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2-07-25 16:2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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