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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동란 와중에도 한국은행에서는 금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꾸준히 금 생산을 독려하고 금 매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1955년 8.26일에는 미국으로 소개(疏開)했던 금괴 10636.896g을 국제통화기금(IMF)에 가입하며 현물 출자하였다. UN이 한국 정부를 승인하였고 UN의 16개국이 6·25전쟁에 참전하여 피를 흘리며 공산주의와 싸워준 국제관계를 고려한 현명한 조치였다. 

 

1953년 7월27일에는 판문점에서 북괴군과 UN군 사이에 조건 없는 휴전협정을 맺었다. 그 후 전후(戰後) 복구 사업이 빠르게 진척되어 1956년에는 화신 백화점이 문을 열었고, 그 전 해에는 화신에서 광화문 방향 길 건너 지금의 S.C 제일은행 자리에 신신 백화점(아케이드)이 개점하여 금은 부가 입점하였다.

 

1962년에는 정부에서 금 생산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굴진비(掘進費) 등을 지급하고 소득세와 법인세를 감면하였다. 또한 광석의 철도 운임을 할인 또는 면제하였다. 

 

금 생산비용을 지원하더라도 일자리가 생기고 금은 국가 자산이며 대외 신용도를 높이는데 달러보다 효용성이 높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광산에 지급한 자금은 국민에게 돌아가지만 캐낸 금은 없던 재화가 생겼으므로 국가 자산이 늘어난다는 원리이다. 

 

한국은행에서 광산에 지원한 자금은 금으로 납품받았는데 이를 검사하고 품질을 체크 할 필요가 있었다.

한국은행에서는 금과 은의 ‘분석시험소’를 설치하여 큐펠레이션 시설을 완비하고 생산된 금의 함량과 중량을 계측하는 국제 기준의 감정 시스템을 갖추었다. 금이 한국은행에 들어오면 우선 금괴의 앞면과 뒷면 여덟 군데 또는 최소 네 군데를 천공(穿孔)하여 표본을 채집하고 이를 분석 시험한 다음 금괴에 중량과 순도를 각인하였다. 

 

이 무렵 생산된 광산 금은 평균 99.3%에서 99.2% 정도였다. 당시는 질산 분석만 하였다. 광산에서는 왕수 분석에 필요한 Pyrex 용기등을 구할 수가 없었고 아황산소다(Na2SO3) 같은 환원제를 구하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당시는 광산마다 구형 발전기로 전력을 자체 생산하였으므로 제련이 제대로 될 수가 없었다. 

 

또한 금 함량이 불량할 수밖에 없는 원인은 금과 은의 제련에 절대적이던 염산(HCl)과 질산(HNO3, 일본어 醋酸), 황산(H2SO4, 일본어 硫酸)의 품질도 불량하였지만, 이것조차도 상당히 귀했다. 염산이나 질산을 담는 용기도 당시는 플라스틱 용기가 나오기 전이라 새우젓 항아리처럼 생기고 주둥이는 아주 좁은 도기(陶器)여서 취급하기가 상당히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그즈음 모든 금제품은 99%로 표기하였고 99%는 100%의 동의어였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대한민국 정부는 6·25 전쟁 발발 시까지도 새로운 화폐를 찍을 형편이 아니었다. 정부에서는 남아 있는 화폐 인쇄 원판으로 필요할 때 ‘조선은행권’을 인쇄하여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6.25 전쟁 중 북괴군이 한국은행 금고에서 탈취한 화폐를 가지고 남한 경제를 교란하므로 국내 경제는 말 할 수 없이 문란해졌다. 전쟁을 수행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다급한 이승만 대통령은 하는 수 없이 맥아더 사령관에게 사정을 말하고 미국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맥아더 장군과 주일 미군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미군의 지휘하에 부랴부랴 일본 대장성 인쇄국에서 ‘한국 은행권’을 인쇄하였다. 

 

이 새로운 화폐는 6월 29일 시작해서 7월 13일 인쇄를 마쳤다. 세계사에 전무후무한 번개 같은 인쇄 작업이었다. 적어도 6개월 이상 걸릴 일을 미군들이 협박하다시피 재촉하고 보초를 서가면서 독촉한 결과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을 넣은 1000원권과 광화문 그림을 넣은 100원권이었다. 

정부에서는 즉시 긴급통화조치를 발령하여 7월 22일부터 구권인 조선은행권의 유통을 금지하고 신권인 한국은행권을 1대1로 교환하여 주었다. 이때의 인쇄비는 모두 미국이 부담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한창 전쟁 중이고 세수입이 없어 화폐 찍을 인쇄비도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하고 한심한 나라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직도 많은 기성세대들은 미국이 보내준 탈지분유를 밥그릇에 찐 딱딱한 분유 덩어리를 입에 넣고 녹여 먹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 탈지분유를 그냥 먹거나 물에 타 먹으면 백발백중 배탈이 생겼다. 뱃속에 기름기가 하나도 없고 기름진 것을 먹어본 일이 없으니 위장이 견디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밥을 지을 때 양재기에 분유를 쪄서 익혀 먹었던 것이다.

 

또한, 한두 번은 미군용 C-Ration을 배급받아 먹은 기억도 있을 것이다. 

그때는 새카만 고약처럼 생긴 쓰디쓴 커피를 왜 미군들이 즐겨 먹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의 그 기억과 함께 미국과 유엔이 아니었다면 우리나라는 아사자가 속출했을 것이고, UN군이 아니었다면 우리들은 지금쯤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의 압제하에서 질곡의 세상을 살고 있을 것이다. 

아니, 살아 남을 수가 있을런지도 의문이다.

 

전쟁 와중에도 그 당시 경제 관료나 한국은행 담당자들은 금에 대하여 그 가치를 잘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세계 여러 나라는 금본위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본래 보유금만큼 지폐를 발행하는 것이 금본위 제도의 원칙이었다. 

 

그 원칙에 따라 화폐는 법률로 정해진 엄격한 제도와 통제 아래에서 발행하여야 한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는 전쟁 중이었다. 금본위 제도의 원리를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군비와 더불어 국민을 먹여 살리려면 돈이 급하니 어쩔 수 없이 화폐를 남발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모든 것을 수탈당하고 겨우 땅덩어리와 가난한 국민만 넘겨받았다. 

 

그나마 나라가 반쪽으로 갈려 죽기 살기로 전쟁 중이고 몇 안 되는 공장과 발전소는 모두 북한에 남아 있었다. 이러한 형편에 대한민국 정부는 자기 나랏돈을 인쇄할 여력도, 힘도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다행히 선각자적인 인재들이 있어서 그 어려운 전시 상황과 국가 재건이라는 막중한 임무 아래에서 한국은행은 매년, 꾸준히 금 생산을 독려하고 매입하였다. 

 

휴전 이후 한국은행은 18년간 매해 수십kg 씩 꾸준히 광산 금을 매입하였다. 정부가 서울로 환도한 후 1953년 2월15일에는 남발한 통화를 정리하고자 긴급 통화개혁을 시행하여 100원을 1환으로 하였다. 

 

1962년에는 삼성광업제련소(장항 제련소)를 대한광업제련공사로 확대 개편하여 1971년까지 영세한 금 광산에서 포기한 저 품위 금광석을 매입하여 제련하였다. 이 삼성 제련소에서 나오는 금괴는 직사각형으로 벽돌 짝 크기였다. 중량은 정형화된 중량이 아니었고 제각각으로 그때그때의 용해된 상태대로 금형 틀에 부었다. 이 금괴를 흔히 삼성 치(삼성회사 것)라고 불렀다. 

 

국가에서 아무리 금 생산을 독려하더라도 본래 남한의 금광은 매장량이 적었을 뿐만 아니라 6·25 동란 와중이라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남한의 금광에서 생산된 것은 정말로 소소한 물량이었지만 이것은 없던 재화가 생긴 순수한 우리 자산이었다. 


글/ 이성재

(사)한국귀금속감정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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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2-02-25 18: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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