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정부 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은 초대 내각을 구성한 다음 1950년 6.12일에 한국은행을 설립하고 초대 총재에 구용서(具鎔書, 1899. 10.21~ 1986. 4.24)를 임명하였다.
6·25 전쟁이 터진 날은 한국은행을 설립한 후 13일이 되던 날이었다. 1950년 6월 25일, 그날 새벽 미명에 3.8선을 뚫고 북괴군의 탱크가 춘천 가도를 달려오고 있었다. 6·25 동란의 시작이었다.
춘천 방면에서의 전투 상황을 서울 사람 누구도 알지 못하였다. 정작 육군본부의 장교들도 전날의 육군본부 장교구락부(Club) 낙성 파티의 숙취로 전쟁 관련 전략회의를 여는 둥 마는 둥 하루를 허무하게 보내버렸다.
육본의 군인들조차 전쟁의 심각성을 몰각한 것이다. 다음날 26일 월요일, 소련제 야크기가 서울 상공을 정찰하고 의정부에서 북괴군의 탱크에 밀린 국군이 퇴각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북괴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전세가 불리함을 짐작한 것은 주한 외교 사절들이었다. 그들은 월요일 아침 일찍부터 한국은행 외국부에서 외화예금 65만 달러를 인출하고 출국을 서두르기 시작하였다.
한국은행은 26일과 27일 이틀 사이 총 화폐 발행액(6월 24일 당시 5백58억 원)의 7분의 1이나 되는 76억8천만 원을 국고금과 각 은행예금 지급용으로 지출하였다. 취임 13일이 된 구용서 총재는 최우선으로 은행 금고에 있던 금괴와 은덩이를 피난시킬 방안을 찾아 온종일 전전긍긍하며 시간을 보냈다.
26일, 그날 저녁 한국은행 총재실에서 퇴근을 미루던 구용서 총재는 자정 무렵 주한 미국 대사관 옥상에서 비밀문서를 소각하는 불길을 보며 불길함을 느끼고 애만 태우며 밤을 새웠다. 정부는 밤 8시에 국무회의를 열었지만 별다른 대책은 세우지 못하고 긴박한 전황에 27일 화요일 새벽 3시경에 수원으로의 천도만을 겨우 결정하였다.
일제는 패망하면서 은행의 금괴를 몽땅 실어갔고, 한국은행 금고에 남아 있던 금은 일제가 물려준 것이 아니고 1945년 해방 이후 매년 은행에서 매집한 광산금 1.3t과 은 18.5t이었다. 이것이 신생 한국 정부의 전 재산이었다.
본래, 우리나라는 1910년 한해에만 2,981kg의 금을 생산할 정도로 금생산이 많은 나라였다. 일제강점기 동안에 금 249t과 은 67t이 일본 본토로 넘어갔다는 공식 기록이 남아 있다. 비공식적으로 넘어간 양도 그에 못지않았다.
이 금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구용서 총재는 금괴들을 어떻게 하든 피난시켜야 했다. 그러나 은행에 있던 트럭 두 대는 이미 군에서 징발하였고, 구형 승용차 4대만 있을 뿐이었다. 금과 은, 화폐와 필요한 서류를 옮기려면 열차 2량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또한 교통부 장관의 허가를 받지 못하여 화차를 구하지 못하였다.
난감한 처지일 때 천행으로 육군 경리단 김일환 대령(후일, 내무부장관 외)과 연락이 되고 김 대령의 주선으로 가까스로 GMC 트럭 1대와 송요찬 헌병대장으로 부터 헌병 일개 분대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김대령은 경제에 밝은 육군 경리단장으로서 금과 은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신성모 국방부 장관을 급하게 설득할 수 있었다.
구용서 총재는 장기영 조사부장(후일 경제부총리, IOC 위원 외)과 신병헌(후일, 한은 총재 외) 문서과장, 문상철 서무과장(은행감독원장, 조흥은행장역임)들을 독려하여 금괴 1.04t과 은덩이 2.5t을 트럭 1대와 승용차 2대에 분승시켜 27일 오후 2시에 시흥까지 갈 수 있었다.
나머지 승용차 두 대에는 은행의 잔무를 정리한 한국은행 직원들이 분승하여 28일 새벽 2시에 가까스로 한강을 건넜다. 마지막 직원들이 도강한 바로 그 30분 후에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었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순간들이었다.
금괴를 실은 트럭은 시흥에서 일박하고 28일 오후 3시 30분경 대전에 도착하였다. 금괴의 행방을 보고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크게 기뻐하며 즉시 남쪽으로 옮길 것을 명령하였다.
금괴는 그날 밤 열차에 실려 경남 진해의 해군 통제부 경리 창고에 29일 새벽 4시 30분경에 입고하였다.
이때, 가장 아쉬웠던 것은 트럭 한 대에 호송 헌병도 탑승해야 했으므로 금 260kg과 나머지 은 16t, 미발행 은행권 100억 원과 화폐를 찍는 인쇄 원판을 한국은행 지하 금고에 그대로 남겨두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은행 지하 금고에 남겨둔 금과 은, 인쇄 원판은 북괴가 패주하면서 약탈해 가버렸다. 북괴군이 약탈한 미발행 은행권은 전쟁 중 남한 경제를 교란하는데 아주 몹쓸 역할을 하였다.
우리 정부 내각은 6월 27일 임시정부를 대전에 설치하였다. 그러나 다시 전세가 불리하여 7월 14일에는 대구로 옮겼고, 8월 22일에는 부산으로 천도하였다.
정부를 부산으로 천도하기 전 당시 대구은행 금고에는 경주 박물관에서 가져온 신라 금관을 비롯한 국보 15점과 보물 124점을 보관하고 있었다.
이 보물들은 정부와 한국은행이 대구에서 철수할 때 국보와 보물들을 48 궤짝에 담아서 달하는 진해 해군 통제부의 경리 금고로 보내게 되었다. 부산으로 천도한 이승만 대통령은 북괴군의 공세에 밀려 낙동강 전선이 위태로워지고 부산도 위기에 몰리며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0년 8월 1일 금과 은 89 궤짝과 보물 48 궤짝을 미국 상선 편으로 진해에서 부산항을 거쳐 샌프란시스코로 보냈다.
미국에 도착한 우리나라의 전 재산인 금괴와 은덩이는 뉴욕 연방준비은행에 보관시키고, 국보 등 보물은 아메리카 은행(BoA)에 보관시켰다.
1953년 휴전이 된 다음에야 국보를 비롯한 보물들은 귀국하게 되었다. 그러나 금 1,036.896kg과 은 2,513.376kg은 1955년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에 가입하며 출자금으로 충당하였다.
그 어려운 시기에 한 푼이라도 전비가 아쉬웠지만, 장래를 내다보고 어려운 용단을 내린 이승만 대통령의 혜안과 결단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것이 훗날 1998년 외환위기 때 국제통화기금(IMF)의 도움을 받게 되는 결과가 된다.
6·25 당시 군대를 기피하고자 별별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한 자들이 나중에 국회의원도 하고 고급 공무원이 된 자들이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보았다. 진실로 감사한 것은 이런 이중인격자들과 달리 그 절박한 시기에 한국은행 임직원들이 보여준 노고와 열성과 애국심이었다.
그들은 자기 가족들의 안위를 돌보지 못하고 비지땀을 흘리며 밤새도록 가마니와 헌 이불을 동원하여 금과 은과 박물관 보물들을 포장하였다. 남들은 제 혼자 살겠다고 도망하기 바쁜 터에 국가 자산을 지키고 피난시킨 그들의 노력과 노고는 참으로 가상하다 할 것이다.
근자에도 군대를 기피하고자 제 손가락을 자르거나 어깨를 탈골시키고, 무릎 인대를 자르며 소금물을 들이켜 불합격을 노리는 얼간이 배신자들이 우글대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임진왜란 때 왜군을 보고 창을 거꾸로 들고 도망간 자들은 공훈록에 들고 충무공 같은 분은 곤장을 맞고 백의종군한 것이 그 옛날 일만은 아니었다.
(사)한국귀금속감정원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