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악한 일제는 조선 팔도의 모든 광산물과 가정집의 유기(鍮器)그릇과 철기류를 강탈해 가고도 모자라 1940년 7월 7일 ‘보석 및 귀금속 매매금지령’을 내렸다. 금·은과 보석을 공출과 헌납이라는 명목으로 모조리 수탈해 갔다. 개인 간의 금 거래를 금하고 민족 자본인 금은방의 진열 귀중품을 모두 거두어 간 것이다.
이에 할 일이 없어진 귀금속 세공 장인들은 졸지에 직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수가 일류 기능인만 600여 명이 넘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수천 년 이어져 온 귀금속 세공의 명맥도 끊기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귀금속 세공 장인들은 어쩔 수 없이 막노동으로 생활하거나 만주로 유랑의 길을 떠났다.
귀금속 소매점들은 거의 문을 닫았고 금은방이 아니라 ‘은방’이라는 간판 아래 겨우 은비녀와 은 귀이개나 팔고 단골손님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들고나오는 금붙이를 구매하는 고물상으로 전락하였다.
인고의 시간이 지나 1945년 8월15일 해방 이후 문을 연 귀금속점은 극소수였다. 정부가 수립되고 정국이 안정에 들어갔어도 귀금속 점포는 크게 늘지 않았다. 도청 소재지 같은 대도시에도 한두 곳만 문을 열었을 뿐이었다. 웬만한 자본 없이는 점포의 진열품을 채울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모두가 호구지책이 어려운 상황에 금붙이를 구매할 처지가 아니므로 금은방을 열어봐야 장사가 될 턱이 없었다.
신문철을 뒤져보면 1946년에 서울의 종로2가 화신 백화점과 인근의 보옥장, 삼창, 명옥당, 대동사, 경미당, 한청 금은방, 대명공사, 천보당, 대성상사, 경화당 등이 광고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서서히 기지개를 켜는 와중에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 동란이 발발하게 된다. 김일성의 야욕이 단군 이래의 민족적 비극을 일으킨 것이다.
말할 것 없이 세상의 사상 중에서 가장 못된 것이 공산주의 사상이다. 소수의 당 간부 그룹이 전체 인민의 고혈을 빨아먹는 사상이 공산주의 사상이고 현재 북한의 실정이다.
6·25 전쟁 와중에도 다행인 것은 정부 관료들이 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전쟁을 수행하려면 자금이 있어야 하고 확실한 자금은 귀금속과 달러뿐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생 한국 정부는 완전한 행정체계를 갖추지 못하여 일제강점기의 많은 법령을 답습하고 있었다. 그 못된 법령 중 하나인 일제의 ‘귀금속 보석 매매금지령’을 정부에서는 1951년 11월 1일 금에 관한 임시조치법으로 ‘금 거래 자유화’”를 선언하였다.
정부는 전쟁을 수행하는 한편 금 생산 3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금 생산을 독려하였다. 금광에 굴진 비등을 지원해 주고 생산된 금을 한국은행에서 매입해 주었다. 수출품이 없으니 지하자원을 개발하고 금 생산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국은행의 금 매입가는 1g당 16,559원이었다.
6·25 동란이 발발하자 서울에서 귀금속점을 경영하던 사람 중 일부는 남쪽으로 피난하였고, 피치 못해 서울에 남아 있던 귀금속점 상당수는 얼마 되지도 않은 진열품을 북괴군에게 강탈당하고 더러는 납북까지 되었다.
귀금속상 가운데 누가 납북되고 실종되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다만 많은 사람이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인민위원회를 앞세워 북괴군들은 귀금속상을 숙청의 대상으로 삼았고, 실제로 많은 사람이 고문당하거나 납북되었다는 사실이다.
1998년 외환위기 때 온 나라 국민이 227t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을 모았다. 사실 이때의 금 모으기는 일반 서민들의 성의가 애국심으로 표출되어 모아진 것이다. 소위 저명인사를 비롯한 상류층은 금 모으기를 외면하였다. 신분 노출을 꺼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이 많은 금은 다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박정희의 유신 정부는 금 수입을 전면 금지하고 심지어 금 밀수범을 국사범 다루듯 중형과 범칙금으로 엄하게 다스렸다. 금을 들여오려면 달러가 반출되는데 이러한 달러 반출을 마약사범이나 국사범으로 취급한 정책은 정부 당국의 명백한 무지와 오류라 할 것이다.
금 모으기의 결과는 모순적이게도 금 밀수가 애국 활동의 증거가 된 셈이었다. 그러함에도 아직도 금괴에 부가가치세를 징수하는 것은 화폐에 세금을 매기는 격으로 불합리한 조처이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수백 수천 조의 자금이 투자처를 찾지 못해 부동산으로 가상화폐로 헤매고 있다. 차라리 금을 영세율로 정하고 화폐로 인정하여 금 거래를 활성화하면 개인 자산으로 보유한 금붙이가 곧 국가 자산으로 치부되지 않겠는가?
한국은행은 겨우 100여t 남짓한 금만을 보유하고 있다. 중남미나 동남아 국가들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있다. 국가에서 하지 못하면 민간인 금 보유만이라도 늘려야 한다.
새벽부터 줄을 선다는 백화점의 고가 명품 가방과 시계가 아무리 좋고 훌륭해도 그것이 국가 경제를 일으키거나 국가 자산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세월이 가면 결국 돈 들여 폐품 처리가 되는 물건들이다.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자국민들에게 해외여행 나가면 무조건 금을 많이 사오라고 라디오 연설까지 하였다. 왜 그랬을까? 하루속히 영세율로 금 거래시장을 개방한다면 국부가 살찌고 시중의 부동 자금을 금 시장으로 유도한다면 부동산 열풍도 가라앉을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일본의 TOCOM 같은 국제 금 거래시장이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다음 회부터는 우리가 간과한 귀금속 업계의 묻어둔 이야기가들을 하고자 한다. 코로나로 귀금속 업계는 정부 당국의 외면 속에서 어떤 보호조치나 재난 지원금 혜택에서 제외되어 있다.
아직도 금을 사치품으로 알고 애써 외면하는 정부 당국이다. 1998년 국가적 위기 때 국민에게 희망을 안겨준 금 모으기 현상을 잊고 있는 것인가 정녕 섭섭하기만 하다.
(사)한국귀금속감정원 고문